석가님은 은나라 후손
석가님은 은나라 후손
동북아역사연구소 김진경연구실
http://cafe.daum.net/asiahistoryreserch/
http://cafe.daum.net/asiahistoryreserch/DHst/179
고인돌 문화와 석굴(石窟) 문화의 관련성 시론-7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부여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과 연(燕), 제(齊) 등과 더불어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에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연(燕)이 서기전 221년에 진(秦)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림 1] 『사기』화식열전
또 『사기』조선열전에 따르면, 한(漢) 무제(武帝) 유철이 서기전 109~8년에 조선 왕검성을 공격하였다고 하므로, [그림 1]은 최소한 서기전 108년 이전 상황임을 알 수 있으며, 조선은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에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기』송미자세가에 따르면, 주(周) 무왕(武王)이 서기전 1046년경에 은(殷)을 멸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니 조선은 이미 서기전 1046년경에 이미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漢) 무제(武帝) 유철이 서기전 109~8년에 조선 왕검성을 공격할 당시, 조선·연·대·제 등의 위치를 추정한 바에 따르면 [그림 2]와 같다.(근거: 본 카페 논문 「주(周) 무왕의 분봉지와 기자 조선의 위치에 관한 연구」 참조)
[그림 2] 조선, 연, 대, 제 등의 추정지역
즉,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맥·조선·진번 등이 연(燕)의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서기전 109~8년에 연(燕)과 대(代)는 조선이 서북쪽을 공격했으며, 제(齊)는 조선이 남쪽을 공격했으므로, 조선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 따르면, 명주(溟州)는 옛날 예국(穢國)이고, 삭주(朔州)는 맥국(貊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예(穢)는 낙랑으로서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맥(貊)은 옥저로서 고구려 비사성과 진국(발해) 남경이 있었던 현재의 산동성 빈주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근거: 본 카페 논문 「낙랑(맥국)과 옥저(예국)의 위치에 관한 연구」 참조)
그런데『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趙)와 제(齊)가 연(燕)의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조(趙)의 본래 위치는 연(燕)과 대(代)의 서쪽에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 계(薊)]를 현재의 북경시로 변이(變移)시키면서 조(趙)를 하북성으로 변이시키고 제(齊)를 산동성으로 변이시켰음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기』화식열전에서 조(趙)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명(明) 대의 사관(史官)들이 고대 지명들을 동북쪽으로 변이시키면서 『사기』도 뜯어고쳤음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게하는 결정적인 증거인 셈이다.
한편,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문왕(神文王) 5년(685년)에 거열주(居列州)를 빼앗아 청주(菁州)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9주(州)가 모두 만들어졌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에 9주(州)의 명칭을 모두 정비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덕왕 16년(757년)에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로,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로, 청주(菁州)를 강주(康州)로,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로, 수약주(水若州)를 삭주(朔州)로, 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로,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로,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무진주(武珍州)를 무주(武州)로 고쳤다.”
<b> </b>
즉, 중국 25사와 『삼국사기』 지리지 등에 근거하면, 신라 9주의 위치를 [그림 3]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근거: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6. 2. 11. 참조)
[그림 3] 신라 9주의 위치 추정지역(685~935년)
그런데 춘추시대부터 한(漢) 대 초기에 걸쳐 기록되었다는 『산해경』에 따르면, ‘조선(朝鮮)’에 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朝鮮) 천독(天毒)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해(海)의 북쪽, 산(山)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燕)에 속한다."
즉,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燕)과 조선이 동서로 나란히 인접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때의 해(海)는 고황하수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재서 역주『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동진(東晉, 317~420년) 대의 학자 곽박이 주석을 달기를, '천독(天毒)은 천축국(天竺國)으로서 부처가 태어난 나라.'라고 하였다. 즉, 곽박의 주석이 올바르다면, 조선(朝鮮)이 바로 천축국(天竺國)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제까지 알려진 것처럼 인도가 천축국이었다면, 인도에 조선이 있어야 하며, 그 서쪽에 연(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으로 추정할 수 있다.(근거: 본 카페 논문 「탁록(涿鹿)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참조)
또 임희경 역 『천축(天竺)은 인도(印度)가 아니다. -법현(法顯)의 역유천축기전(歷遊天竺記傳)- 』에 따르면, 『수경주소(水經注疏)』 하수편(河水篇)을 인용하면서 천축제국은 은(殷)나라 백성들이 남쪽과 서역으로 가서 천축국을 이루었으며, 특히 중천축국(中天竺國)은 은(殷)의 백성들이라고 적고 있다.
즉, 『수경주소(水經注疏)』의 기록이 틀리지 않았다면, 석가(釋迦)의 선조(先祖)는 바로 은(殷, 기원전 1600~1046년경)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은허(殷墟)가 20세기 초에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에서 발견됨으로써 현재까지 은허가 은(殷)의 도읍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기』주본기(周本紀) 에 근거하여 주(周) 무왕이 분봉한 지역을 토대로 은(殷)의 도읍지를 찾아보면, 현재의 하남성 주구(周口)시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다.(근거: 본 카페 「주(周) 무왕의 분봉지와 기자 조선의 위치에 관한 연구」참조.)
[그림 4] 연(계), 제, 노 등의 본래 위치와 은 도읍지 추정지역(현 하남성 주구시)
그런데 석가모니(釋迦牟尼, Siddhattha Gotama) 부처님의 탄생과 반열반(般涅槃)은 기원전 624~544년으로서 현재의 모든 불교국가 및 UN에서 통일 불기(佛紀, 서기전 544년)를 채택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서기전 5세기 말에 현재의 인도 부다가야(Buddha Gaya)에서 득도하신 후, 부처님의 말씀이 산스크리트어 도는 빨리어로 기록되어 서역(현 신강위구르자치주)으로 전래되었다가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 서기전 248~서기후 226년)에서 온 지루가참(支婁迦讖), 구자국(龜玆國)의 쿠마라지바(344~409년) 등에 의하여 전진(前秦, 351~394년, 도읍지 장안), 후진(後秦, 384~417년, 도읍지 장안) 등 5호 16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439년)를 전후하여 현재의 산서성 서안시 등지에서 수많은 경전(經典)들이 한문(漢文)으로 번역되고 강의(講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經典)들이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역(현 신강위구르자치주)을 거쳐 실크로드를 통하여 현재의 산서성 서안시 방향으로 전래됨으로써, 불교가 서역에서 동쪽으로 전래되었지만, 석가모니(釋迦牟尼, Siddhattha Gotama)의 선조는 은(殷) 출신으로서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계속>
[그림 5] 은(殷) 석가(釋迦)족 이주 추정경로